어제 들은 음악

관계를 맺고 싶다구요? 저는 끊으려구요 : 그러려니 - 선우정아

어쩌다 얼리어답터 2023. 3. 23. 0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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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 때리기 좋은 곳

 

이 한 줄의 리뷰만 보고 무작정 통영의 한 게스트하우스로 달려간 것은 몇 년 전 이맘때였습니다. 그 리뷰에 꽂혔던 그때에는 내 머릿속에 무어라도 집어넣기 싫은, 그런 때였습니다. 

 

리뷰 그대로 그곳은 정말 멍 때리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확 트인 바다가 아니라 조그만 만(灣) 안쪽 깊숙한 곳에 게스트하우스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양쪽이 숲으로 에워싸고 있어 바다는 마치 호수마냥 갇혀 있는 모양이어서, 파도조차 거의 없었던 아늑한 곳이었습니다. 아침에 잠을 깨어 도미토리 침대에서 고개만 살짝 돌려 창문을 밀면 보이는 가두어진 바다. 누워서 그냥 바라다만 보고 있어도 몸과 함께 정말 마음이 평안해지는 곳이었습니다. 물론 게스트하우스 앞 나무그네에 앉아 바라보는 가두어진 바다도 그랬습니다. 리뷰가 맞았습니다. 정말 멍 때리기 좋았던.

 

6인실 도미토리 룸이 시끌벅적해진 것은 다음 날 오후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들어온 것도 아니고 단지 어떤 젊은 의사와 한 젊은이가 각자의 여정으로 와서 그 룸에서 같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틀 정도를 같은 룸에서 지내야 하니 인사라도 나누어야 했는데 그즈음에 사람을 만나고 엮이는 게 싫어서 그냥 건성으로 인사치레를 하려고 했습니다. 

 

젊은 의사가 대뜸 여긴 어떻게 왔냐고 물어왔습니다. '멍 때리기 좋은 곳'이라는 단 한 줄의 리뷰를 보고 왔다고 했더니, 왠지 기대 밖이라는 표정을 했습니다. 다른 이유가 있나? 무슨 사정으로 왔냐고 되물으니 새로운 사람들도 만나고 이야기도 나누고 여흥도 즐기는, 그런 상상을 하고 왔다고 했습니다. 저는 관계맺기가 싫어서, 있던 관계도 끊고 싶어 혼자만의 여행을 왔는데, 그 젊은 의사는 저와는 정반대의 목적으로 왔다니, 다소 당황스러워서 실소를 흘렸습니다. 

 

그때... 전날 게스트하우스에 처음 들어설 때 주인이 했던 말이 쓱 지나갔습니다. 

'여기는 파티형 게스트하우스가 아니라서 조용히 쉬었다 가시기 좋을 겁니다'라는. 

파티형 게스트하우스? 

'게스트하우스가 숙박만으로는 장사가 잘 안 되니, 저녁에 오신 손님들과 파티 같은 사교의 장을 만들어 술도 팔고 그럽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엔 그냥 흘려 들었는데, 아, 이 친구는 그런 목적으로 여기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든 것이었습니다.

 

"형님은 사람 사귀는 거 싫으세요?" (벌써 형님이란다. 오지랖도 좋으네...)

 

테헤란로에서 IT 관련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매일 업계 관계자, 기자, 공무원, 증권사 애널리스트, 변호사 등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저녁께 책상 앞에 앉아 그날 받았던 명함들을 꺼내어 보면 최소 스무 장, 많을 때엔 50장이 넘기도 했습니다. 요즘처럼 폰으로 명함을 찍으면 자동으로 입력되는 시스템이나 e명함을 주고받는 일은 몇 년 뒤에나 나왔기 때문에 일일이 그 명함을 PDA의 주소록에 담아 정리했었습니다. (PDA.. 아실랑가요...? ㅋ 몇몇기능이 빠진 요즘의 스마트폰이라고 생각하면 편하겠네요)

(오른쪽에 보이는 조그만 카드가 무려 1GB입니다. 당시 가격으로도 지금 폰 하나 가격인데, 더욱 놀라운 건 메모리가 아니라 작은 하드드라이브입니다)

그것은 어느새 1만 개 남짓의 주소록이 되었습니다. 저는 제 주소록에 그 사람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언제 처음 만났고 언제 미팅을 했고 언제 식사를 했고 언제 술자리를 했고 그때 무슨 이야기를 했고 개인의 생일 등 그 사람과 관련된 기록이 주소록에 빼곡했습니다. 자주 만난 사람일수록 주소록의 메모는 더 길어졌습니다. 행여 그 사람을 다시 만날 약속이 생기면 미리 주소록에 기록해 둔 것을 먼저 읽고 오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생각하고 만나는 게 버릇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지난주에 따님 생일이었죠? 좋은 시간 보내셨어요?'라고 인사를 건네면 대개 상대방은 자기를 잊지 않고 기억해준다는 느낌을 받아서일까 그날 만남은 매우 좋은 분위기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만든 기록은 사회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때만 해도... 

 

카카오톡이 처음 나왔을 때 친구 리스트에 그 모든 사람들이 거의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그게 자랑스러웠습니다. 제 커리어로 스스로 만든 자산이라고 여긴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많은 사람들과 제가 정말 관계를 맺고 있기는 한 걸까 라는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수년이 지나도록 전화통화 한 번 한 적 없는 사람들이 부지기수. 정리하자. 하지만 주소록에 빼곡한 기록들을 버릴 수 없기에, 저는 별도의 e메일 계정을 만들어 자주 연락하지 않는 사람들을 새로 만든 계정의 주소록으로 옮기는 작업을 했습니다. 폰에는 그 계정의 주소록을 동기화시키지 않는 방법으로 폰의 주소록과 카카오톡의 지인 리스트를 줄여 나갔습니다. 그렇게 줄였음에도 1천 명이 넘었습니다.

 

통영 게스트하우스로 갈 즈음에는 더욱 사람들이 싫어졌고, 아니 그 관계가 싫어졌습니다. 그냥 멍하니 지내고 싶었던 게 사실이었습니다. 그렇게 관계라는 것에서 도피하러 멍 때리기 좋은 곳으로 왔는데, 그곳에서 오지랖 좋은 이 젊은 의사와 또 다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니. 실소가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

 

이후에도 1천 명이 넘는 지인 리스트를 두 번째 계정의 주소록으로 옮기는 작업은 계속됐습니다. 옮길 때 가장 큰 기준은 이 사람과 다시 연락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한번 추려둔 주소록에서 연락할 가능성이 없는 사람의 기록을 두 번째 계정으로 넘기며 드는 생각은 그 사람과의 추억과 그리움이었습니다. 잘 지내겠지? 하지만 그 대답을 들을 수 없으니, 그래 그러려니...

 

선우정아의 이 노래를 만난 것도 딱 그 무렵이었습니다. 

 

만나는 사람은 줄어들고 그리운 마음은 늘어간다

이 첫 소절에 그냥 마음을 뺏긴 듯했습니다. 슬펐습니다. 통영의 가두어진 바다 앞에서 어둠을 핑계로 눈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애써 닦지 않았습니다.

 

 

블루프린트 같은 선우정아의 싱글 재킷은 색바란 추억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싱글에는 같은 곡이지만 영문 버전인 노래가 하나 더 들어 있습니다. 제목은 Far Away. 그래, 멀리 떨어져 있으니...

 

어제 들은 음악 : 선우정아 - 그러려니

 

※ 앨범에 있는 곡보다 트롬본이 하나 더 들어가 음악이 더 풍성해진 느낌 버전.

 

Bonus version : 전반부의 피아노 아르페지오를 어쿠스틱 기타로 대체한 밴드 버전. 선우정아가 리코더로 반주를 하기도 하고, 퍼커션, 베이스의 간주도 들어갑니다. 물론 피아노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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