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0년대에 대형가수라고 불리는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꼭 덩치가 커서 그렇게 부르지는 않았겠지만 키도 컸고, 무엇보다 음량도 좋고 웬만한 국제가요제 같은 곳에 출연할 만한, 무대를 휘어잡을 에너지가 큰 가수들이었습니다.
그중 가장 대중적이었고 화제를 몰고 다니며 '대형가수'라는 타이틀을 만든 가수는 패티 김이었습니다. '서울의 찬가', '초우' 등으로 유명했던 당시의 디바였고, 작곡가 길옥윤의 (혜은이 이전의) 뮤즈이기도 했습니다. 패티 김 보다는 늦게 태어났고 늦게 데뷔한 '저 꽃 속에 찬란한 빛이', '머무는 곳 그 어딜지 몰라도'를 부르며 가요제를 휩쓸고 다녔던 박경희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정미조는 조금 결이 다른 대형가수였습니다. 성량은 풍부했지만 샤우팅 없이도 그 깊이로서 사람을 압도하는 무언가가 있는 가수였습니다. 아이유가 부른 '개여울'을 불러 데뷔했고 ('개여울'의 원곡자는 1966년 발표한 김정희라는 가수입니다) '휘파람을 부세요' 같은 노래를 부르면 전혀 음량이 크지 않으면서도 그를 대형가수라고 부르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무대를 장악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대 미대를 졸업하면서 가수에 데뷔했는데, 1979년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미술을 계속하기 위해 유학을 갔고 학위를 따 한국에 돌아와 교수로 재직하다 정년을 맞았습니다. '개여울'을 불러 데뷔한 지 37년이 지난 2016년, 67세의 나이에 정미조는 음반 1장을 발간했습니다. 앨범 타이틀이 '37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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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벼락에 기대 울던 작은 아이
어느 시간 속에 숨어버렸는지
나 그 곳에 조용히 돌아가
그 어린 꿈을 만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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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틀 곡 '귀로'의 한 소절입니다. 마치 37년 전 데뷔 때의 그 꿈을 만나기 위해 돌아가는 길을 그린 듯한 노랫말. 이 노래를 실제 들어 보면 괜한 센티멘털에 빠지기도 하고, 노가수의 인생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해지는 기분은 혼자만의 것일런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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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어느 날, 저는 한 통의 e메일을 열어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이라면 '흥, 별거 아니군'하며 대수롭지 않게 느낄 일이지만, 그때 e메일을 열었을 때 충격적으로! 노래 하나가 흘러 나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은 e메일에 태그 하나만 넣으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참 재미난 일이었습니다) 저도 남에게 e메일을 보내 음악을 들려줄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곤 '털보의 뮤직메일' 이라는 제목을 달아 음악과 사연을 함께 담아 매주 2,3회 정도 지인들에게 보냈었습니다. 그 e메일을 받아 본 지인들이 호평과 함께 다른 사람에게도 들려주고 싶다는 요청이 많아져 수신자가 점점 늘어났고 혼자 메일링을 하기 힘든 수준에 다다랐습니다. 그래서 일일이 수신자를 지정하지 않고 희망하는 사람이 구독신청을 하면 자동으로 보내어지는 메일링시스템을 이용하게 되었고 그 독자가 점점 늘어나 한 번에 6천 명까지 보내는 수준까지 되었습니다. 그러기를 4~5년. 200회 정도의 e메일을 쓰고 난 다음, 번아웃일런지도 모르겠고 바쁜 회사일 때문인지도 모르겠고, 새로운 취미에 빠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고, 아무튼 그 '털보의 뮤직메일'은 그렇게 사라져 간 추억이 되어 버렸습니다.
정미조의 노래를 듣다 보면, 이전 '털보의 뮤직메일'이 다시 기억나곤 합니다. 어느 시간에 숨어버렸는지 몰라도 그 곳에 조용히 돌아가면 그 어린 꿈을 만나려나 하는 대목에서는 울컥하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어제 들은 음악, 정미조의 '귀로' 입니다.
ps. 링크된 동영상 속에서 이 노래를 정미조가 부른 건 2021년, 그의 나이 72세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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